‘시간의 표현’을 위한 사물의 재현 / 박정구(미술 평론가)
‘시간의 표현’을 위한 사물의 재현
박정구 (미술 평론가)
미술이 외계나 사물의 재현을 목적으로 할 때, 그 근거는 다른 무엇보다 대상이 지닌 현재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이러한 목표를 버리기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외양을 묘사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에 진력해왔다. 재현되는 사물의 모습은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흘러가버린 시간 즉 과거에 지녔던 모습이나 놓였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도 지을 필요성을 갖지 못하는 단절된 한 시점에 보이는 모습이다. 또한 그것은 미래의 어떤 가능태로서의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물의 재현이 이러한 속성을 가진 것이라고 할 때, 이창수가 보여주는 재현방식은 매우 독특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대상을 화면에 묘사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이미 그려진 것은 끊임없이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음과, 붓을 더해가는 순간 마다 흘러간 시간만큼 새로이 변모한 바로 지금의 대상을 묘사하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가 완성한 대상의 묘사를 자신이 가진 대상에 대한 기억의 총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기억한다는 것 또한 불확실하고 부분적인 정보에 의존하므로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대상의 재현은 분절된 시점의 불완전한 기억들이 종합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 대상을 묘사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시간의 흐름 뿐 아니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정) 전반과 같은 보다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시간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의 바탕에서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사물과 외계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이해는 결국 시간과 연관된 것이라고 하겠는데, 형식상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동시에 진행되는 그의 작업들은 모두 이렇게 시간에 얽힌 존재인 자신과 사물의 표현이라는 공통된 맥락을 지닌 것들이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주제를 담은 보다 효과적인 표현을 꾸준히 모색하고 실험하고 있기도 하다.
합판 위에 그린 나무 그림은 무엇보다 한국화풍으로 묘사된 나무가 눈에 띄는 소재다. 아울러 화면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그 위에 흩뿌리고 바른 투명 수지이다. 하지만 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나무 윤곽을 따라 새기고 판 선들과 물감을 입히고 다시 갈아낸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일련의 작업을 작가의 설명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무는 그 서있는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로서, 싹이 나 자라온 시간 동안 온갖 환경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존재이다. 따라서 나무는 그 시간의 축적물이며, 묘사를 위해 작가가 바라보는 지금의 모습은 그 나무의 전모가 될 수 없다. 한편으로, 하나로 제한된 작가의 시점 역시 나무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며, 관찰할 때마다 파악되는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정보들 또한 이미 기억되어 있는 불확실한 나무의 정보에 더해진다. 이렇게 묘사는 다중적으로 왜곡되며 동시에 이미 왜곡된 기억에 의존함으로써 다시 한 번 왜곡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재현된 나무는 그가 나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기억의 총합이 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사물의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함께 보는” 것이다.
묘사만으로도 작품으로서 회화적 완성도를 가질 수 있을 이 나무그림들은, 새기고 갈아내고 수지를 덧입히는 과정을 통해 사물의 재현과는 다른 의미와 지향을 가지는 작업이 된다. 즉 사물의 재현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작가의 시간에 관한 인식을 드러내는 목적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눈에 익은 동물이나 식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 또한 그 재현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사물이 작가의 눈에 들어왔을 때(혹은 작가가 어떤 사물을 한 공간에 놓았을 때), 그 공간을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이제까지 흘러간 시간이 축적된 공간이며, 따라서 그 시간 동안 생겨난 크고 작은 온갖 사건들, 그리고 그 공간에 머물렀던 모든 존재들의 흔적이 잔존하는 공간이다. 그리하여 새롭게 그 공간을 점유한 사물은 그 흔적(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어떤 기(氣)와 같은 에너지)과 교섭하며 다시 관계를 형성한다. 화면에 재현된 소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붓자국들은 바로 이러한 그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묘사된 대상(예를 들어 병아리)은 작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을 근거로 재현된다. 그러나 병아리에 대한 그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게 재현될 수밖에 없다. 만일 그가 병아리와 관련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묘사된 병아리는 병아리에 대한 그 당시의 기억에 크게 의존하게 되므로, 그 기억을 이루는 그때의 상황·감정·분위기 등의 총체가 재현에 강하게 반영(재생)된다. 병아리가 가진 그 밖의 보편적인 속성들은 병아리에 대한 또 다른 기억들, 혹은 새로운 관찰의 결과들과 섞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된 또 다른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때는 그 사물의 외형과 우리가 습득한 사물의 과거 이미지를 결합하여 이해하고 바라본다. 결국 우리는 사물의본 모습과 과거의 모습을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후각에 의한 사물의 환기 또한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이 아닌 연속적 관계로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어떤 냄새가 후각을 통해 감지되면, “사물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물이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는 순간 그 사물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냄새를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물을 기억해내는 일은 과거의 것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과거의 것이 된 사물에 관한 정보에 일정 시간이 경과한 이후, 즉 현재의 새로운 정보를 결합하여 이해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현재의 존재가 지난 시간의 축적이며, 따라서 미래에는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물에 대한 기억 혹은 인식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회화의 재현이 그 시점에 대상이 가진 모습을 고정하는 것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이라고 할 때, 작가가 대상이 겪어온 시간의 여정을 화면에 함께 표현하려 한다는 점이 앞에 이야기한 그의 독특한 재현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포획하여 화면에 담으려는 시도이면서,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해 새로운 이해 방식을 추구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작업이 보여주는 일정 정도의 회화적 성취에서 일탈하여 지속적으로 또 다른 표현방식을 찾고 있는 이유이며, 동시에 보는 이 역시 재현된 사물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의 화면이 주는 일상적이지 않음에서 오는 ‘불편함’과 ‘불안함’의 원인을 찾아 그림을 이리저리 읽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가 꾸준히 모색하고 시도하고 있는 자신의 주제와 의도를 전달할 또 다른 표현방식이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지 예상하기 쉽지 않기에, 그의 작업을 통해 사물의 외피나 그림의 표면 뒤에 존재하는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그림을 통해 얻는 매우 즐거운 경험이며, 우리 스스로 사물과 회화에 대한 관습화된 감각과 접근을 물렁하게 만들어야함을 환기하게 되는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