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본 이야기/2창수의 세상 미술 이야기

인정하지 않는 자는 인정받지 못한다.

2창수맨 2015. 12. 7. 17:33

인정하지 않는 자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림 : 檀園 金弘道, 타작(打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에서 종이에담채, 27cm x 22.7cm, 1780년경,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Artist 2창수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지 않을 때 좋은 평가를 해주는 귀인을 만나는 일은 참 설레는 일이다. 1745년 출생된 단원 김홍도는 증조할아버지 김진창(金震昌)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본다면 무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단원이 태어날 때는 중인 집안이었다 한다. 그를 따르고 존경하던 조희룡 기록에 그의 유년기 기록이 거의 없는 이유가 출신에 대한 문제로 인한 이유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훌륭한 학자를 출신으로 평가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조희룡의 스승 사랑은 좀 특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홍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귀염둥이(?) 이었나?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 강세황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정조<홍재전서>

 

단원 김홍도는 이렇게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덕인지 단원은 조선 후기 다양한 기록을 남겼으며, 훌륭한 작품과 활동으로 안산에 단원구라는 명칭의 행정구역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중국에 기대어 중국식 그림을 재현하는 일에 멈춘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사실적 문학이론을 그림으로 전하는 일을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풍속도이다. 사진이 발달된 오늘, 풍속도의 모습에 감흥을 느끼기 어렵지만, 당시에 일반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시도 자체가 파격이었다. 단원은 경기도 안산에서 성장했다. 당시 안산은 노론과의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 소북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으며 당시 유명했던 강세황이 안산에 거주할 때 인연이 닿았다. 이것이 단원의 중요한 정신적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단원은 신필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그림 그리는 일과 함께 정신의 고매함도 강조하였다. 훌륭한 작품은 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 사회와 더불어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이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모습은 중요한 자리에서 결정적 일을 할 때 빛이 난다. 결정을 내리고도 자신이 안 한 것이나, 모르는 일이라는 파렴치한 답변을 해대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화 무뇌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예술 지원책은 당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획일적 문화를 만들 것이다. 충북의 도의회에서는 2016년 예산 심의를 이렇게 하게 되었다. 문제가 불거지니 슬며시 추경에 올리면 통과 시킨다는 답변이 언론에서 공표되었다. 그들에게는 당리 당약이 중요하겠으나 충북문화가 더 큰 범주다. 국회의원에게 인정받은 도의원들이다. 총선이 시작되면 시민들에게 인정 받아야 할 국회의원이다. 결국은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