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기본인 사회구성에 관한 이야기
촘스키의 선전모델 Propaganda Model 宣传模式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 충북대교수 김승환)
2001년 9·11 직후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원인 제공을 했으므로 근본적 책임은 미국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위험한 발언 때문에 그는 재직하는 MIT대학 내에서도 경찰의 경호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전에도 “나는 미국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으로 미국정부의 폭력성과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하여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좌충우돌하는 문제인물로 매도되기도 한다.
21세기 전후의 촘스키(Noam Chomsky, 1928 - )는 정치평론가 겸 행동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50년대에 변형문법의 생성원리를 밝혀 언어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언어학자다.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문제점과 스키너의 행동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언어의 기본 원리와 규칙에 해당하는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UG)을 정초하여 명성을 떨쳤다. 유태인 가정에서 유태식의 교육을 받은 그는 1953년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생활하면서 극우 민족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을 목도한 이후 평생 권력과 국가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로 일관했다.
촘스키는 1967년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글을 쓰는 한편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세금거부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 사회, 국제문제로 영역을 넓혔다. 그는 1988년 허먼과 함께 쓴 [조작된 동의 ; 대중매체의 정치경제(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에서 미국의 언론이 소수 엘리트 지배계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을 여론조작의 선전모델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 폴 포트(Pol Pot, 1925 - 1998)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 정권의 대량학살(大量虐殺, genocide)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촘스키는 ‘가치 없는 희생’과 ‘가치 있는 희생’으로 구분한 다음 이를 증거로 언론이 권력과 자본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미국의 주류언론은 대중들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독자/시청자를 사고파는 자본의 거간 역할을 하는 한편 지배계층 이데올로기 전파의 도구로 기능한다.
언론의 기능과 역할을 회의하도록 만드는 대중조작은 1640년 크롬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의회제도와 소수 엘리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근대 언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주류언론은 이른바 ‘전통적인 제퍼슨의 역할(Traditional Jeffersonian Role)인 정부에 대한 견제를 포기하고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자본가들의 이익에 따라서 보도한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집단의 여론조작이 엘리트 지식인들의 동의, 동조, 묵인 등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도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객관적으로 보도하며 정의를 수호한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촘스키는 여론조작의 선전모델과 전체주의의 폭력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것은 다른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선전모델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대중조작이라는 점에서 비운의 혁명가 그람시(A. Gramsci, 1891 - 1937)가 말한 ‘동의를 통한 헤게모니(hegemony)’와 유사한 면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근대 언론의 대중조작은 다섯 가지의 선전모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첫째 언론의 소유구조와 그들의 이익, 둘째 광고주들의 영향력, 셋째 주로 정부나 지배계층으로부터 얻는 취재 자료, 넷째 다양하고도 정교한 관리, 다섯째 반공주의 등이었는데 다섯째는 소련의 해체 이후 ‘공포를 통한 동의’로 바뀌었다. 여기서 유래한 신조어인 선전모델은 각종 언론과 매체가 왜곡된 보도를 하면서 '조작된 동의(Manufacturing Concent)'를 얻어가는 여과(filtering)의 과정이다. 아울러 이들은 주류언론의 문제점을 인터넷과 같은 전자매체와 대안언론이 부분적으로 보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허먼과 촘스키의 자료선택과 분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과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