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창수맨 2012. 8. 25. 23:35

기억을 더듬어 쓴

청년 예술가 한묵

 

 

Artist 2창수

처음 뵌 것은 2005년쯤이었던 것 같다. 우렁찬 목소리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주위 노 화가들의 존대를 보며 그들 보다는 선배이시구나 이렇게 막연 하게 생각하고있었다. 노화가들 중에는 물방울을 그리시던 김창열, 빛을 그리시는 방혜자, 얼굴을 그리시던 권순철 등 많은 연령의 화가들이 계셨다. 어린 사람이 어른의 연세를 묻는 것은 참 버릇없는 일이라서 그냥 마음으로 가늠하며 70~80대 화가 분들의 존대를 받으니까 80대 후반 쯤 되시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90이 넘는 것은 그 후 알게 되었다. 파리지역 원로 화가들은 전시 뒤풀이 장소에서 다 함께 모이곤 하였다. 그럴때면 한묵선생님의 ‘바다’라는 자작시를 들을 수 있었다. 우렁차게 뱉는 한묵선생님의 목소리는 파도가 왈칵 쳤다가 사라지는 듯 운율을 넣어 읇조리시는데 자주 듣다보니 어떤 날은 실수 하시는 것도 보곤 했다. 낭송하시다가 잠시 기억을 못하셔서 가만히 생각하시는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정지된 자세로 숨을 참으며 다음 구절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난 웃음 참느라 배에 엄청난 힘을 가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즐거움을 함께한 그 시가 이중섭 화가를 위한 헌시라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한묵 선생님은 1914년 태어났다. 20세 초반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여러 한국 작가들과의 교분이 있었는데 그중 이중섭과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중섭은 아주 집이 부자라서 용돈 오는 날이면 집 앞으로 유학생들이 모이 곤 하였다. 그리고 술을 먹었다. 그런 날은 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묵 선생님은 1940년 한국으로 귀국했고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묵 선생님은 과거 옛이야기를 틈틈이 해주셨다. 금강산 지역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투를 하나 썼는데 그것이 공산당소속 청년미술동맹 회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 일대의 미술 연맹 대표 격인데 형은 공산당 청년회장 같은 직책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당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들이 일본 유학도 갔다 오고 하니 그림을 아주 잘 그릴 것이라고 믿는 눈치여서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사실적으로 잘 그리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리라고 시키는 것만 그리라고 해서 공산당체제에서 그림 그리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일 후에 그곳을 벗어나 서울로 내려 왔는데 1~2해인가 있으니 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을 갔더니 그곳으로 속속 미술가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도 반갑고 해서 어찌어찌 술도 먹으며 같이 전시도 했다고 한다.

 

이중섭과는 과거 일본 유학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하는데 이중섭은 2살 동생이다. 유복한 집 아들인 이중섭은 해방 후 공산 정권하에도 그런대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상황이 무섭게 바뀌었다고 한다. 국군의 남하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 후 있는 돈을 털어 배를 구입하였고 그 배를 구입 할 때도 여러 번 사기도 당하고 고초를 당하며 겨우 마련한 후 제주도 까지 피난을 갔다고 한다. 1년여를 제주도 피난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을 때 통영으로 한묵선생과 옛 화우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통영으로 왔다. 그때 가난한 화가들끼리 빈대 붙어 같이 살았었다고 한다. 한묵선생 집에서 그린 그림이 은지화 였다고 한다. 그 당시 부두 노동을 하며 번 돈으로 담배 사다 피고 그 종이에다 그리곤 했다고 한다.

 

한묵 선생님은 1955년부터 서울에서 교수직을 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 그림 그리고 싶다고 교수직을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 그때의 나이가 48세였다. 안정된 것을 버리고 새로운 화가 고행을 시작했다. 여전히 선생님은 혼자였다. 70년대인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회부 기자출신의 노처녀가 서울에서 선생님을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쏙 빼앗긴 기자는 무작정 한묵 선생님의 파리 주소하나에 의지 한 체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며 한묵선생에게로 왔다. 아마 되돌아가는 돈도 없이 오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갈 곳 없는 계획으로 온 여인을 맞이하여 같이 현재를 보내고 계신다.

 

 

 

 

파란 만장 할 수밖에 없는 시대 환경과 편안함을 뿌리치고 이렇게 힘들게 예술가로 살아가는 화가를 안다는 것은 상당한 행운이다. 이로 하여금 우리는 시대 문화 예술인의 덕목을 배우고 그로 인해 미술가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비록 몸이 노쇠하여 최근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붓을 놓아야 할 때 놓는 것은 한 평생 함께한 습관을 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우리 주위에는 기웃 거리는 화가와 지망생들이 많다. 덩치는 작은데 포장에 열을 올리는 오늘날 미술은 꼭 경제 개념 도입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작가들이 스스로 정화를 하고 지키지 못한 예술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아주 좋은 축제를 갔다 왔지만 99세 老화가 전시회의 감동을 미술관에서 느꼈다면 더 좋은 감정으로 마음에 안착 되었을 것 같다. 조금 더 건강하게 몇 년 후 다시 전시장에서 뵐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