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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아트’ 4년에 대한 번잡한 분석

2창수맨 2015. 5. 10. 09:10

시방아트4년에 대한 번잡한 분석

 

artist 2창수

3년을 채우고 4살이 된 시방아트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얻어 만들었다. 월간의 특성상 마감일정으로 다가오는 하얀 지면을 채워 나가기 위해서는 똑 바로 걷는 것이 아닌 갈지자로 걸으며 글을 마무리 지었고 지적한계에 대한 해결은 원고구걸로 해결해야 했다.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생기는 희열은 근본적인 원고 수집에 대한 불안을 동반 했고 등장 후 사라지던 여타 잡지를 생각나게끔 했다. 시방아트의 건강 회복을 위해 몇 가지로 나누어 분석을 해보았다. 이 분석은 늘 그렇듯이 개인의견을 정리한 것이고 시방아트를 빗대어 지역 문화, 미술환경에 대한 분석을 해보았다.

 

시방아트의 한계는 특수하게 만들려는 장르의 나눔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것을 몰라 그나마 안다는 미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 것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미술이라는 한계점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미술이 사회와 어떻게 나누어 져있는가? 란 고민이었다.

 

미술이 미술만으로 가치가 있는가?

 

문화와 예술이 나누어 진 것은 사회가 복잡해지는 근대에 와서이며 이때 전문분야를 세분화하여 직업특성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불과 4~50년 전에 와서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가 되었다. 산업사회가 됨으로 직업 세분화를 국가가 나누게 되고 기술자격에 대한 승인도 국가가하면서 직업, 전문분야가 나누어 졌다. 직업세분화는 세금징수를 위한 국가의 방침과 함께 했기 때문에 직업구분은 세금 추징을 원활히 하기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 매체의 발전으로 소수전문 지식만 전문성을 가졌다 주장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것은 소위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직업뿐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체육과 같은 기능인들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특히 미술은 여느 다른 기능적 예술 활동보다 덜 기능 중심의 예술 활동이다. 과거와 같이 사실주의 미술의 득세라면 기능성이 강조 되겠지만 다양한 표현, 철학 논점이 공존하는 현대미술은 한가지로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 하다. 미술이론가들이 전시하고 그림 팔았다고 자랑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을 보면 장르의 나눔이 필요할 것인가란 질문도 의미 없다.

 

현대미술에서 미술만으로 가치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시선도 높아졌고 높아진 시선만큼 미술에 대한 이해도 함께 상승했기 때문이다. 순수 조형성에 근거한 미술에 대중은 장식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에 수많은 정보와 모든 물건들에 장식된 현란한 조형요소가 사회에 널려있고, 대중 매체 등 모든 곳에는 미술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으며 또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중 매체는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내가 선택할 때 언제나 찾아 볼 수 있는 어느 정도 상호교류가 가능한 매체이다. 상호교류 가능한 매체발달은 대중의 선호도에 따라 계속 바뀌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넓은 이해의 수준을 만들 수 있으며 변화에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폭 넓은 사고를 위해서는 미술을 미술만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야하며 통합적 이해를 위한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미술은 이미 소통을 중심으로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이다. 올바른 소통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해야 하므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미술의 중요조건이다.

시방아트는 어떤 미술로 존재해야 하는가?

 

미술의 중요한 요소인 소통은 그림을 읽는 감성과 미술에 대한 정보 없이 미술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현대미술을 책 읽듯이 한가지로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시방아트는 미술로 세상 읽는 법을 만들려했다.

 

미술이 가진 다양한 현대성 중 미술 이야기로만 채우려 한 것은 미술이 갖는 비정형성을 가지고 세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잘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의 시각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다양한 시점의 제공이 어려워 개인적 시각 중심의 잡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흑백으로 제작되어 미술이 가진 시각을 중심으로 전하는 잡지가 되기도 어려웠고, 글이 중심인 미술잡지는 발행인의 한계로 인해 그럴싸한 글로 만들기도 어려웠다. 시방아트는 타 장르에도 개방을 하여 보다 다양한 문화 잡지로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중이 이미 멀리하는 미술에 기준을 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중의 삶에 미술은 무엇인가?

 

이미 대중은 미술이 필요 없다.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미술과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에 굳이 미술을 자신의 삶과 나눌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전문 미술가들은 대중의 무지를 이야기 한다. 대중은 아무런 불편 없이 스마트 폰이나 노트북, 곡면 TV 등을 즐겁게 시청하고 있음에도 대중의 미적 감각에 대해 나무란다. 미술가들이 만든 그리다 만 것 같은,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미술작품들에 대해 대중은 속으로 비웃는다. (겉으로 비웃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지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조용히 작품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면 사실 여부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미술에 대한 사회요청은 사회에서 생겨나는 문제점이 미술교육을 통해 극복가능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보면 미술가를 위한 것이 아닌 대중에 대한 심리안정이 문화예술정책의 목적이다. 사회가 바라는 미술의 역할은 사회의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 주된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고 선택을 할 방법도 없다. 자본으로 인해 부자와 빈민이 생겨나게 되며 시간이 지속될수록 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자본주의는 투자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경제체제이다. 투자가 안 된다면 노동을 통한 피 지배의 업무를 수행하게 되고 그러한 사회적 위치를 자녀에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물려줄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은 인류가 가진 기본적 소양인데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 내에서는 극복이 어렵게 되면 집단 문제가 발생된다. 이러한 불만을 해결하여 사회의 안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당신은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가능토록 세뇌 시키는 방법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창조적 행위를 한다면 개인성취감과 만족감을 높일 수 있다. 해결 불가능한 사회구조문제는 예술을 통한 관심 돌리기를 이용하여 사회체제안정을 목적으로 진행된다.

 

미술이 대중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대중은 미술을 포함한 문화를 스스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으며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사회제도가 이미 존재 한다. 시방아트는 어느 누구에게나 지역 문화라는 큰 틀에서 참여를 통한 지역문화지로 진행 할 것이다. 참여가 없다면 없는 것으로도 의미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