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본 이야기/2창수의 세상 미술 이야기

- 예술품 수준을 어떻게 나눠야 하나? -

2창수맨 2012. 7. 2. 19:47

- 예술품 수준을 어떻게 나눠야 하나? -

 

 

 

                                                                                                                                                       artist 2창수

숙변 제거의 기능 인가?

되도 않는 작가들이 작품의 질 혹은 수준을 천박한 자본에 의해 나누고 있다.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이 사는 동안 얼마를 벌지를 미리 예측해 돈으로 물어주는 황금만능 시대니 그럴 수도 있지만 예술을 가격으로 정하고 또 그런데 속하지 못하는 작가들을 무시를 하니 문제인 것이다. 사실 그렇다고 그렇게 그림 파는 작가들이 그 닥 훌륭하지도 대단치도 않지만 끼리끼리 모여들어서 남들과의 수준을 나누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름 이름있는 작가는 고고한 척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작가들이 그림을 정가에 팔지 못하고 있다. 화가들은 생활비를 마련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낮은 가격이라도 그림을 팔아야 되지만 그림을 파는 갤러리는 수수료를 받을 수 없기에 망해가는 것이다. 결국 그런 작태가 갤러리도 망하고 작가도 망해가는, 화가가 살지 못하는 예술가 지옥의 지역 문화가 되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뒤로 몰래 그림 파는 일이 생활을 위한 어쩔 수 없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만 그로인해 지역 미술계는 망해가고 있다. 만일 그러하게 그림 파는 일이 생긴다면 정가에 꼭 팔기를 권한다. 그래야 지역에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된다.

 

갤러리는 좋은 작가를 발굴하여 작가에게 투자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갤러리들은 당연히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내야 한다. 이러한 갤러리들의 역할을 다 하기위해서는 갤러리를 통한 그림 순환 구조가 정착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생겨날 미술관등은 반드시 정상적 거래를 통해 미술품 구입을 해주길 바란다. 결국 이 행위가 분명 지역 미술을 살릴 것이다.

 

 

 

 

 

 

이것과 다른 분야의 미술

조형물 업자들은 그동안 나름 정상적 금액으로 정상적 방법을 통한 미술품 구매 혹은 제안을 해왔다. 공모의 형식이나, 수의계약으로 미술 장식품을 만든 것인데 1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물 앞에 덩그러니 있거나 공공미술을 표방한 환경 미술품이 그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방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변화 되었고 이젠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조형물이 되었다. 있거나 없거나 전혀 시각에 자극이 되지 않는 회색 도시를 만드는 일을 잘 수행해 왔다. 대학에서는 그래도 그런 것이 무슨 졸업 후 직업이 되는 양 관련 작가들을 불러와서 가르치고 또 일도 시키며 학생들 용돈 벌이라도 시켜준다. 그로 인해 돈 번 작가를 스타처럼 느끼고 따라하는 학생들까지 생겨났으니 이젠 좀 더 정확히 그런 일들을 정리 분석해야 한다.

 

문화재진흥법 시행령 제 24조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이 있다. 건축비용의 일정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미술장식의 설치에 사용하여한다는 강제 조약이다.

설치 조형물은

1. 회화ㆍ조각ㆍ공예ㆍ사진ㆍ서예 등 조형예술물

2. 벽화ㆍ분수대ㆍ상징탑 등 환경조형물

이딴 것 등이다.

 

대다수 우리 주위엔 도시의 철학, 사회, 역사적 맥락과 관계없는 화강암, 스테인레스로 되어있는 조형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부르는 것이 엿장수 값인 이 조형물들은 청주지역의 비엔날레 행사 때에도 빠짐없이 동내를 빛내어 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진행된 작품들은(조형물 업자들의 생각은 다를지 모른다) 도시의 품격을 심하게 저하 시킨다. 사실 이렇게 설치된 조형물들은 한 도시의 미적 수준을 평가하기에는 꽤 좋은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공산국가도 아니고 무슨 상징 조형물을 이리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했던 오락 게임이 있었는데 (신의 손인가?) 내가 신이 되어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그런 게임이다. 게임 중 대중들의 충성심을 높게 만들기 위해 상징물을 만들곤 했다. 이런 것처럼 오늘날 상징물은 이런 의미인가? 내가 좋은 곳에 잘살고 있다는 혹은 문화적 공간에 살고 있다는 세뇌를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덜 떨어지는 조형 장식물로 말이다.

 

 

 

 

 

과연 조형물이 예술인가?

조형물이 예술이 될 수 있나? 수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결국 예술은 예술로 볼 수도 있기에 그냥 저급 예술품이라 말해야겠다. 표절의 문제가 발생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저급 예술도 되지 못하는, 도시를 거대한 문화 쓰레기 매립지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간 조형물 업자들이 예술가인양 행세를 하며 지역 조형물 사업을 이끌어 왔다. 그들을 맞이하며 같이 손잡고 힘찬 발걸음을 해나간 청주지역의 미술 교수, 단체장들 역시 그들과 즐거운 동거를 해왔다. 차이의 다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지역에서 어른 대접을 받던 대학교수, 선배 화가들마저도 조형물의 자본에 슬쩍 편승하는 것이 아닐까 심히 염려된다.

 

예술의 범주를 넓게 볼수도 있다. 그러면 분명 장식 미술도 예술이다. 그 정도로 만족을 해야 하는데 조형물 업자들은 고상한 예술가들처럼 혹은 지역의 대표 예술가들처럼 군다. 모뉴먼트 작가라고 다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다. 시대는 달랐지만 로댕처럼 훌륭한 모뉴멘트 업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뉴먼트라는 기념물은 칼레의 시민 [The Burghers of Calais]과 같은 대단한 작품도있다.

 

1347년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한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칼레시의 시민들은 저항을 했다는 명목으로 학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시장, 시민대표6명이 칼레시를 위해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에드워드 영국왕에게 간다. 이러한 사건으로 칼레시를 구하게 되는 영웅들은 기득권이 가져야할 도덕적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처럼 되는 작품이다. 이러한 영웅을 1884년 로댕에게 수의 계약으로 제안을 했고 로댕은 만들었다. 당당히 죽음으로 가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 죽음앞에 무기력한 체념, 고뇌등의 모습을 담은 영웅들의 모습을 만든다. 시민들의 불만과 관료들의 멸시를 통해 시민 광장에는 1895년에서야 제자리로 찾아간다.

 

이렇게 논란이 있는 조형물이 있는 도시가 즐거운 예술의 도시인 것이다. 최근 있었던 청원군 문의면 조형물 사태처럼 표절에 대한 논란이 아닌 작품의 해석이 작가와 시민들 사이의 멋진 토론이 지역 사회를 문화와 예술이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 제작이 있겠지만 훌륭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 누군가 정직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간 미술계하면 정말 정직하지 못하게 자금을 유용하며 단체를 이끌어 왔고 가난한 예술가와 단체들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러다 단체장이 되면 그간 힘들었던 것들에 보상 심리가 일어났는지 비 공개적인 일들이 슥슥 일어난다.

 

심사, 심의 재도의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한 결정은 대단한 사람이 와도 단정 내리기가 쉽지 않다. 각기 기호에 따라 어떤 결과들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해빠진 말로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걸이라 그런다. 그렇게 나누기 힘든 일을 가끔 취미로 작품 활동하는 작가들, 지역 단체 장들이 단정적 결정을 내린다. 그러다보니 이젠 그들이 하는 년 중 최고 행사인 공모에는 작가들 말고 학생들 밖에 없다. 취미로 시작한 분들도 물론 있다. 그런 대회가 그 단체가 하는 가장 큰 행사이다. 이런 행사에 정부가 지원금을 주면 안 된다. 그건 지역 예술 활성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사를 했을 때 그것이 그냥 끝나 버린다. 심의나 이의 제기 등은 존재하기 어렵다. 동내 작은 미술 대회라면 그려러니 하지만 5월, 6월에 있었던 뜨거운 지역 이슈(문의면 조형물 표절의혹)를 본다면 심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심히 의심되는 심사 때 나온 표절의혹을 심사의원 중 한명이 그냥 덮어버리는 그런 사태는 심사의 가장 기본 적인 사항도 심사의원 개인의 의견에 따라 그냥 묵살되어 버리는 것이다. 유독 돈이 많이 몰린 조형물 사업에 이렇게 많은 잡음이 들리는 것은 당연 하겠지만 수 천만원 주고 석공들에게 주문해서 놓은 그 조형물을 예술품으로 보라고 하는 폭력은 이제 없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사보다 심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심사의원의 자질도 문제지만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해야 하는 사람들까지도 서로 간 이익에 대한 공유를 통해 행정만 바보로 만들고 시민들만 질 떨어지는 공공미술품을 구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간 이러한 문제에 항상 깊숙이 개입 되어있었던 예총은 이런 사태가 언제 끝나나 손가락만 빨지 말고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더 좋은 의지를 보여주는 집단이 되기를 바란다. 6월 21일 예술 표절에 대한 공개 토론회가 있었는데 충북문화재단, 충북문화예술포럼, 민예총, 기자단, 시민들이 모여 표절에 대한 미술의 윤리의식, 문의 사태에 대한 방향 모색이 있었다. 그러나 예총만은 청소년 축제 시상식에 가야해서 회장, 사무처장, 미협 회장 등은 다 그곳으로 가서 시상해야 한다는 황당한 답변이 있었다. 공공 목적성을 가진 단체가 가진 의식 수준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런 단체가 또 심사를 한다고 할 것이고 심사에서 배제 시키면 공정치 못하다는 주장을 열심히 하는 한 지역 예술계는 똥 밭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역의 예술의 정화와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라면 지역 예술인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자기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모르는 척 바쁜 척 하는 그런 단체는 없는 것이 지역 예술을 위해서 나은 방법이다. 행정가들은 필요 없는 단체라면 가차 없이 정리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시민들을 위한 것이 좋은 행정이지 단체를 위한 행정은 들어보지 못한 행정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축제나 예술 행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지역을 벗어나서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돈이면 소녀시대가 빅뱅과 함께 손잡고 노래하고도 남는다.

 

 

 

지역 예술계의 자정 노력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 예술 단체들이 정직해야 한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기에 내가 시방아트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정의 노력이 필요할 때 이익을 재지 않고 과감하게 예술가의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한다. 대체 얼마만한 이익이 걸려있어서 모르는 척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속된 예술가들과 그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다수의 예술가, 학생, 지역민들에게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금의 유용이 오랜 관행이 되었다. 정화된 단체의 의견은 이런 잘못된 행정에 수정 제시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더 나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내부의 문제를 과감히 수정하고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동내 아이들 시상식보다는 백배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남의 일로 생각지 않고 앞장선 모든 사람들 덕분에 조금 나은 예술 환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행정을 말하기 전에 그 행정이 경청 가능 하게할 단체가 되는 것이 시급하다.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핍박해지고 사람의 가치가 열악해 질 때 모든 인류가 쉴 수 있는 여건의 마련이 가장 좋은 예술 활동일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정직이 최고 예술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저급한 돌덩이, 스텐인레스 조형물이 예술단체의 암묵적 동조로 행정의 도움을 받아 도시 곳곳에 놓여지고 있다. 그렇게 돈과 공을 들인 조형물들을 언제까지 예술품이라 우기며 더 만들 것인가? 더군다나 창작이 중요한 예술가의 덕목임에도 얄팍한 논리로 말을 돌리며 아니라 우기는데 법전 열심히 본 판사의 의견에 예술 창조의 논리를 정리해야 하는가? 현상이전 이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발생된 현상에 올코 그름을 나누는 법의 잣대에 어떻게 맞출 것인가? 과거 지역 예술 단체에서 벌인 법원, 검찰청 미술품 사건 때처럼 조용히 있으면 슬며시 넘어가는 일이 될까 걱정된다.

 

이제 이 지역에서는 훌륭한 예술품들이 그러 했듯이 논란이 있으되 미래적인 방향으로 조형물들이 작품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 논란은 10년 후 지역예술의 색을 완전히 바꿔놓으며 가장 좋은 품격 있는 예술 도시로 만들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라는 말이 생각난다. 예술단체가 지역예술에 올바른 일을 못했다면 지역 정부는 그들에게 예산 집행을 하면 안된다. 지난 10년간 그래왔으니 예산에 반영시키는 우매한 행정 하지 말고 지원 하지 않더라도 살아 남는 단체에 중복 투자함이 맞다. 이제 지역민들의 수준은 무엇이 더 필요한 정책인지 스스로 깨우치고 있다. 선거 때 표를 의식하는 정치적 결단이라면 부패의 수준이 같이 가는 치졸한 방법일 것이다.

 

단체에서 하는 가장 큰 대민 지원행사인 지역 공모. 그리고 지역 공모 미술대회 입상 경력? 이젠 자기 이력에서 빼는 작가들이 많다. 부끄러움은 스스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