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 이야기/다른 사람이 본 나의그림 이야기

화가 이창수의 그림에 대하여 / 이재희(철학박사. 중국정경문화원 원장)

2창수맨 2010. 8. 30. 17:39

화가 이창수의 그림에 대하여

 

 

이재희(철학박사. 중국정경문화원 원장)

 

이창수는 그림을 유리 위에 그리고 그 유리를 여러겹으로 겹쳐놓음으로써 평면이 입체가 되도록 2차원이 3차원이 되도록 만들며, 때로는 겹쳐놓은 유리의 테두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하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3차원 이상을 엿볼 기회를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한다.

이렇게 주어진 공간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 했고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그가 보여주려고 했으나 보여줄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어야하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가진 이해의 지평속에서 나름대로의 감상을 하고 즐기면 되려나? 철학적 입장에서 평을 써 달라는 그의 말에 비평 방법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한차례 해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츄어로서 전문가인체 평을 해야하는 자의 자격지심인것 같다.

 

그러나 이창수 화가가 나에게 그림을 전하면서 즐겁게 생각나는대로 써달라고 하는 말에 위안을 받고 나는 그대로 하려고 한다. 우선 이 두 작품을 받고 생각이 드는 것은 기법의 통일성과 그리고 주제의 상이성이다. 공간과 두께를 유리평면으로 분해해서 여러 층을 겹침으로써 그는 적절한 착시효과의 도움을 받아 깊이있는 공간성을 확보한다.

이렇게 확보한 공간에 그는 천년을 갇혀있었다는 지니의 호로병을 반으로 갈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호로병에는 그러나 지니대신 삼지창을 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들어있다. 바다 속에 빠져있는 호로병이 아니라 호로병 속에 바다가 들어있다는 위트있는 성찰인 것같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마개 열린 호로병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그 연기위를 아주 조그만 수퍼맨이 날아간다.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나 하늘을 나는 수퍼맨도 결국 호로병 속에서 나온 한갓된 존재라는 말인가? 결국 인간 즉 나의 한계가 호로병과 같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 호로병도 유리에 조금씩 색을 칠해 교묘하게 배열한 결과 얻어진 허상이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또 다른 작품 속에는 신화적 상상력과는 전혀 다른 자연의 대상을 모사한다. 꽃밥과 꽃잎이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표현되고, 그 꽃잎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앞으로 구부러져 있어 마치 큰 꽃 한송이가 이중유리창에 박제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특히 유리의 테두리를 완전히 밀봉함으로써 꽃꽂이 수반위에 놓여있는 꽃보다 더 억압되어 보인다. 더구나 자연에 있을때는 자그마하고 이쁜 꽃일텐데 박제되어 유리 속에 들어있으니 대인국에서 걸리버가 본 꽃처럼 너무 거대해 보인다. 이렇게 억압되고 과장된 자연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꽃을 통해 보게 되니 마음이 불편하다. 이렇게 불편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겸손함을 배우고 자연과의 공존을 요청하는 메시지로 두 작품의 주제를 엮어보면 주말연속극 결말처럼 진부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