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 이야기/다른 사람이 본 나의그림 이야기

비개념적 유리회화, 작가 이창수의 형식실험에 대한 비판적 소고

2창수맨 2013. 11. 23. 10:29

비개념적 유리회화, 작가 이창수의 형식실험에 대한 비판적 소고

--뒤샹과 근친한 어느 유사과학자적 화가의 시선에 대해

미술평론가 유현주

 

작가 이창수가 2007년 어느 날 뒤샹의 <대형 유리>작품을 보았던 이후, 그에게 미술은 단순한 관습적인 그리기가 아닌, 충분히 즐거운 ‘실험’의 양상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체 어떤 사물을 보면 그것을 뒤집거나 거꾸로 생각하는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작가가 우연히 골프장의 철망을 보고 떠오른 생각은 캔버스가 아닌 철망에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철망에 그리기 시작하던 작가는 전에 보아둔 뒤샹의 <유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결국 200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리에 그린 입체적 회화를 탄생시켰다. 작가 자신도 명명하기 어려운 이 ‘형식’을 무엇이라고 일컬어야 할까? 혹 이것은 어떤 형식에로 귀환시킬 수 없는 것 아닐까? 말하자면 ‘형식’보다는 ‘태도’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고민은 이창수의 근작들이 뒤샹의 <유리>가 갖는 공간의 연구와 같은 개념과 유사한 것인가, 혹은 세상에 대한 모종의 ‘태도’때문에 선택한 매체인가, 평면과 입체 사이의 일종의 형식실험인가에 대한 필자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된다. 즉 이창수의 유리 시리즈에 내포된 미술사적 매체 실험이 ‘개념적인’ 태도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뒤샹의 <유리>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동시대미술의 표면에 떠오른 예술의 유명론적 논제들, 즉 장르의 파괴와 경계의 해체, 예술과 비예술의 통합이란 테제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 개념으로서의 예술과 같은 담론이라고 하겠다. 추측컨대 이창수는 뒤샹의 그 작품에게서 회화가 보여줄 수 없는 입체적인 사물의 공간을 ‘유리’를 통해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뒤샹이 만든 대형유리가 두 개의 상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그야말로 4차원적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상자의 역할을 했다면, 이창수는 통유리를 겹겹이 잇대어 풍경과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배운 전통적인 순수예술, 즉 회화와 조각의 유산을 청산하기 어려웠던 교육적 유산과도 연관이 있지만, 체질적으로 이야기꾼 기질의 작가가 뒤샹의 추상화된 기호적 이미지의 형태보다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형상’을 선호하는 것과도 관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뒤샹과 이창수에게 숨어있는 공통된 ‘유사과학적’ 관심인데, 그려진 대상이 추상이든 구상적인 것이든, 그 이미지 너머에 있는 근원적인 것, 즉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의 법칙에 대한 짙은 호기심이다. 뒤샹의 <유리>를 보면, 상단의 공간에 모호한 신부의 형상과, 하단의 공간에 아홉 개의 주물로 된 남성 이미지 그리고 공격적인 초콜렛 분쇄기를 대비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뒤샹이 그토록 관심을 가진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한 구조, 즉 성행위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는 작품으로 먼저 읽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야말로 뒤샹이 고백하듯이 현대 기하학, 물리학과 같은 지식을 동원한 매우 부조리하고 우연적이고 카오스적인 시공을 연구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게 만든다. 필자는 절대적 시공간의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뒤샹이 선택한 <유리>작품이 바로 키슬러가 ‘X선 회화’라고 부른 것에 대해 공감하면서, 바로 이러한 ‘유리’의 투명한 공간에 이창수가 풀어 놓은 사물들과 그 사물을 쫓는 우리의 안구운동이 우연치 않게 이러한 카오스의 세계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예로 이창수의 작품 <아무렇게나 해도 규칙은 있다>(2010)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수박씨를 수박의 줄무늬에 배치해 그린 그림이다. 낱장의 유리에 겹겹으로 배치한 수박씨가 전체적인 수박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어디에서 시작하든 나름의 규칙을 갖는다는 ‘신기함’을 작가가 우연히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작품 <뫼비우스의 띠와 물고기 4마리>(2010)에서는, 위와 아랫면이 따로 없는 이 띠구조를 일정한 간격을 둔 유리판들에 겹쳐 그려서, 관찰자의 시선이 어느 시점에 모아지면 제자리를 찾아 모양이 드러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뫼비우스의 공간을 통해 원근법의 고정된 관념을 깨고 뒤에서 바라볼 때 더 잘 드러나는 물고기! 선형의 공간이 아닌 비선형적인 공간 속에서 카오스로 존재하지만 ‘카오스모즈’ 즉 조화로운 카오스의 법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이는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우주공간의 ‘상대성이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창수는 아직 과학적 발견을 주제화하는 것을 머뭇거린다. 오히려 작품을 구성하는 이야기(뫼비우스의 띠 사이사이에 자신의 분신, 혹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은 네 마리의 물고기)와 유사과학자의 시선이 묘하게 얽혀있는 인상을 준다.

 

 

이창수의 작품들은 주로 제도 내부의 잘못된 틀을 비틀고 싶은 자신의 비판적 사유들을 유리와 유리 사이의 공간에 펼쳐놓는다. 그 이야기들은 시골풍경이나 민들레꽃이나 플라타너스, 파리, 물고기와 같은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시작하는데, 매우 생태학적인 발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도시의 개발논리에 대한 반감과 로컬주의를 주장하는 작가의 목소리(<천국의 풍경-시화마을>)를 내거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보호논리에 대한 비판(<천국의 민들레>, 도심에서 벌어지는 인위적인 가로수 정비에 대한 비판(<사각 플라타너스>)을 가하며 때로는 반어법적으로 혹은 유머와 아이러니를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작품 <2010년의 봄 아무렇지 않게 떨어지는 꽃잎 I, II>을 보자면, 유리판과 유리판 사이사이 배열된 낙하하는 이 꽃잎그림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사실은 “처절한 종족생존을 위한 처절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곧잘 “아무렇지 않게 떨어지는 꽃잎”이란 작은 현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아이러니함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파리’는 그가 곧잘 역설의 도구로 삼는 자연이면서, 자신의 자아를 투영시키는 존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파리’는 이창수에게 때로는 군중에 같이 함몰되지 못하는 예술가의 분신으로 여겨지며, 때로는 인간해골구조의 작은 ‘점’이 되기도 한다. 마치 멀리서 보기엔 ‘인간’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파리’로 이루어진 흉측한 몰골을 나타내는 것 같은 존재, ‘인간’ 자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으로까지 밀고 가는 ‘착시’ 이상의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이창수의 유리작업은 순전히 4차원 공간에 대한 호기심어린 작업이 끌어낸 개념적 작업이 아님은 명백하다. 다만, 작가의 눈에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잘못 결합되어 있거나 비틀린 공간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유리라는 투명한 공간에서의 유사과학자적 시선의 형식실험과 교묘히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창수의 유리작품은 그러므로 뒤샹식의 유사과학자적 실험의 태도로 추구한 결과와도 다를 뿐 아니라, 헤럴드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되었을 때’와 같은 개념미술가적 태도를 집대성한 전시의 정신과도 다른 차원에 서 있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라고 하는 1969년의 헤럴드 제만의 전시가 개념미술의 역사적 개시를 선언한 이후의 과정을 보건대, 사회 혹은 세계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먼저 형식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헤럴드 제만의 그 전시에서와 같이, 기름덩어리를 바닥에 바른다고 해서(요셉 보이스), 유리 이글루를 만들거나(마리오 메르츠), 전시장 바깥의 보도 블럭을 깨는 행위(마이클 하이저), 심지어 전시에 초대받지도 않은 작가가 전시장 주변을 줄무늬포스터로 도배하는(다니엘 뷔랭) 행위를 두고 동시대미술은 ‘형식실험’의 담론으로 묶지 않는다. 이창수의 경우는 형식실험의 범주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오브제와 내러티브의 범주를 여전히 고수하는 그의 형식실험이 ‘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할까. 즉 그의 유리그림에 숨은 내러티브들이 실은 세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는 그림자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창수의 유리회화가 실제와 같은 입체적 착시를 만들면서 동시에 사슴의 머리, 인간 골상, 파리, 작은 곤충, 민들레, 꽃잎, 풍경 등을 통해 실은 사회에 대한 미시적 담론을 꺼내고 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