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돕는 겸손-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Artist 2창수
어릴 적 친구들이 가방에서 자랑스러이 꺼낸 이국적학용품으로 아이들의 주눅을 죽일 때면 거의 미국산 아니면 일본산이었다. 당시 한국기술력이나 사회상황은 급속도로 변화되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외산 산업품의 첨단성에 모두 찬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외국산물건에 열광을 보이던 시절을 지나 오늘날에는 과거 약탈당했던 조선 산업품인 문화재를 다시 찾고자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외국, 특히 일본에 있는 약탈 문화재는 훌륭했는지 몰래 되 훔쳐 본국 송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법원과 일본법원간의 소유권 문제까지도 생겼다. 1965년 박정희 정부에서 한일협정을 하였고 민간분야에서도 문화재반환에 대해 장려한다고 협정을 하였다. 그러나 돈을 빌려간 사람보다 주려는 사람이 갑이 되어서 개인소장이 이미 되었으니 개인끼리 알아서 하라는 일본식의 답변만 들어왔다. 이것을 본다면 오래전에는 우리물건이 꽤 쓸 만 했던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겠다.
안평대군의 자취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 의해 사라진 졌다. 그러나 최근 영화 ‘관상’을 보면 다시금 박진감 넘치는 조선 정치사를 스크린에서 보여주기도 하고 한명회같은 전략가를 중심으로 다룬 드라마를 통해 안평대군을 비추어 주기도 한다. 안평대군은 자취를 다양하게 남겨졌으나 1893년 몽유도원도를 일본정부가 불쑥 자국의 문화재로 등록하면서 일본에 의해서도 알려졌다. 안평대군이 무계정사에 걸어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사쓰마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놈이 훔쳐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조선명화는 1950년 덴리교(天理敎) 본산인 덴리대학도서관이 소장하게 되었으며 한국에 천리교의 포교를 위해 한국에 몇 차례 전시를 갖게 되었다. <천리교는 1836년 나카야마 미키[中山美枝]가 일본 나라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에서 창립한 신흥 종교이다. 우리나라에는 1900년에 일본인 포교사에 의하여 부산에서 포교가 시작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03년 천리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를 해왔고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과 보조를 맞추어 많은 수의 신자를 거느렸으며 오늘날 또한 많은 수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반일감정이 있음에도 1988년 신도수가 43만명이나 된다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열렬히 보여주고 있다. 신자수가 1,000만을 넘으면 분명 돌려줄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유랑하는 꿈을 꾼 뒤 안견에게 꿈의 내용을 이야기 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안평대군위력이 실감 가능하도록 많은 문인들이 제발(題跋,그림에 감상의 평을 곁들여 놓는것)을 해놓았는데, 그 시대 대표적 인물은 김종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총 20명의 찬문이 있다. 이 그림에는 시,서,화가 고르게 격이 높은데 당시 시, 서에 능하지 못하면 학자나 관직에 오르기 어려운 시대이니, 고명한 문인들이 제발을 남겼을 시, 서는 분명 높은 경지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은 최고 화원이 그려 놓았으니 조선 최고명화라 봐도 될 것 같다.
글의 내용파악과 글씨를 보는 능력이 안 되어 모르겠지만 시와 글과 그림의 조화가 함께 하기는 분명 어렵다. 하나의 완벽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경지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겸손함에서 나온다. 몽유도원도는 분명 훌륭한 그림이지만 격조 높은 글과 시가 없으면 단순한 중국 북송의 곽희풍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의 겸손함은 안평대군의 청을 받아 현실과 이상세계를 그림으로 연결하였고 이상과 현실에 내가 닿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염원이 이 그림을 명화로 만든 것이다. 덤으로 거기에 글을 올린 정치인들의 숙청까지 있었으니 살생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명화이다.
서로를 세울 수 있는 겸손은 나를 위해 남을 내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가진 높고 거대한 아파트와 두둑한 통장잔고 번쩍이는 옷으로 상대방의 부러움을 샀다면 어릴 적 가방에서 학용품 꺼내던 수준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학용품을 주로 썼을 국민미개인 운운하던 버릇없던 청년은 주위친구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경험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미개한 나라에서 미개인들의 지갑 빨지 말고 발달된 나라에서 잘 살면 좋겠다.
위대한 것은 이상에 대한 다양한 조화를 서로 간 도우며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 그림이 명화가 되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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