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본 이야기/2창수의 세상 미술 이야기

기형 사회 - 소박한 형제가 보여준 그림보는 법.

2창수맨 2015. 2. 20. 10:56

기형사회 - 소박한 형제가 보여준 세상 보는 법.

 

 

 

Artist 2창수

세계 어디를 가도 화가들은 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물감은 어디에서 시작 되었을까? 물감 중 특히 기름에 섞어 쓰는 방법은 이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네델란드의 반 에이크 형제(Van Eyck)는 둘 다 당시 유명했던 형제화가이다. 그중 동생 얀(jan 1390?~1441)이 계란과 안료를 섞은 물감인 과슈의 급 건조를 해결하고자 기름을 처음 사용했다 전해진다. 어느 미술가 보다도 후대에 막강한 영향을 준 화가이다. 유화라는 쓸 만한 재료를 주었으니... ...

 

그림에 등장하는 얼굴이 희끗한 두 주인공은 15세기 폴랑드르식의 예복을 입은 부부이다. 옷은 그렇게 입었지만 이탈리아 루카출신 부유한 상인 부부인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molfini)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명화 중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등장하는 이 그림은 물감 제조 역사보다 숨어있는 도상학적 매력의 그림이다. 도상학(iconography, 圖像學)은 그림속에 숨어있는 상징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도상학은 종교적인 숨은 내용을 파악하던 것이었지만 나중에 와서는 작가의 의도를 그림 속에 숨겨두고 찾아내는 재미를 주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비록 작가의도와 달리 군부대에 시찰 온 사단장의 방귀를 천둥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오류를 범하여도 숨어있는 매력은 분명 있다.

 

얼굴이 창백하여 엽록소활성을 원하는 듯 한 부부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결혼서약 하는 장면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당시 복식보다는 몸의 모양에서 개인적으로 임신한 모습으로 생각한다. 신을 벗는 것은 당시 서약행위형식이다. 뒷벽 거울 속에는 또 다른 2명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거울위에는 ‘1434년에 반에이크 여기 있었다.’라고 써놓은 것을 본다면 거울 속에 비치는 2명의 서약식 참관인중 한명은 얀 반 에이크일 확률이 크다. 그리고 곳곳에 이야기를 숨겨둔 개, 과일, 악세사리 등은 숨겨놓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그림의 숨겨둔 해석은 왜곡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데포르메(déformé)를 불어 디포름(difforme)-기형적이라는 뜻으로 바꾸게 되는데(언어 유희적인 농담) 획일적인 결론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왜곡자 혹은 기형적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이 그림을 통해 배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림은 각자 봐도 된다는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 놓았다. 화가 서명을 마지막으로 작가는 더 이상 그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림은 이제 감상자 고유의 것이므로 감상자가 믿는 것으로 그림을 보면 된다. 개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있다면 그림에 등장하는 개를 나쁘게 해석하거나 혹은 불행하게 해석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관점주장이 가능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을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의 평가를 당연한 듯 수긍 한다. 명화를 대할 때에는 가만히 있으면 분명 중간은 간다는 애매한 확신을 하여 남의 평가를 수용한다. 오랫동안 유교문화에 익숙한 처세술인데 괜히 고개 처 들었다가는 크게 쥐어 박히고 여러모로 뒷모습 초라한 경우가 많아서 일 것이다. 살기위한 저자세는 모든 곳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사자성어 일벌백계의 공이 크다. 엉성하게 고개 쳐들다간 갑자기 일벌로 몰리어 나만 매몰차게 당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나를 혼내서 백 명을 가르치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의 억울함이야 말로 다 못하지만 분명 당하는 사람은 약자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일벌 백계로 다스렸던 사람치고 강자 보았는가? 만일 강자였다면 더 강자가 살기위해 총알받이로 내몰렸을 것이다.

   

통치의 편안한 방식은 공평이 아니다. 공평은 다양한 상황에 대한 각기의 해석을 만들어야 하기에 어렵다. 그래서 보다 쉬운 방법은 공평하게 국민을 가르칠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계도의 대상인 국민은 멍충이라서 옮고 그른 것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가진 생각대로 사회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가중치를 두어 엄벌로써 다스린다. 병법에 능하다는 손자(孫子)가 사용한 일벌백계는 자신의 통치를 따르지 않던 모조전투 훈련 중에 생긴 말이다. 궁녀들에게 병법을 실험하려 했으나 웃으며 대충하니 군령을 어긴 죄를 물어 목을 쳤다. 이를 통해 말 잘 듣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 하는데 손자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궁 안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궁녀를 죽였으니 현실과 가상을 구별 못하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일벌백계를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사회존속을 위한 것인지, 전투 중으로 삶을 임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통치의 편안함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분명 사회는 엄벌로 다스려질 만큼 엉성하거나 위태롭지도, 국민도 멍충이는 아니다. ‘한 가지 생각으로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왜곡이거나 기형이다.’라는 것을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이 믿는 것을 믿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며 행하여도 일벌로 다스려지지 않는 사회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