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 Conatus 珂尼蒂思 自然倾向
김승환 / 문화 비평가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며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저주 받으라. 나갈 때도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하지 마시고 분노가 이 자를 향해 불타게 하소서! 어느 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와 한 지붕에서 살아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고 그가 쓴 책을 보아서도 안 된다. 이것은 유태교가 1656년 스피노자를 파문하면서 남긴 저주다. 자기 민족과 종교를 배신했다는 낙인이 찍힌 스피노자는 렌즈 깎는 일을 하다가 45세의 나이에 죽었다. 유태인들로부터 사상 유례가 없는 끔직한 저주를 받았지만 그는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던 철학자였다.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난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총명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유태교의 랍비가 될 것으로 기대되던 그가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합리주의와 유일신을 부정하는 범신론(Pantheism)을 주장하면서 유태사회는 그를 파문했다. 청년 스피노자는 기독교와 데카르트를 비롯한 다양한 신학과 사상을 접한 후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유태교의 신앙과 교리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신이 자연이고 자연이 신이라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신과 같다는 범신론을 신봉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브라만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는 스피노자의 사상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와 달리 정신과 물질의 일원론을 주장했다.
극단적 고독을 견디면서 깊은 사유를 한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학 정치-논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1670)와 사후에 출간된 대작 [윤리학]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자연의 인과관계이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신도 자연원리의 속성이 드러난 양태(Modus)라는 것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신은 자연의 원인이고 신의 결과가 자연이라고 보기 때문에 유일신과 창조론을 부정하고 범신론과 실체론을 긍정했다. 또한 스피노자는 모든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결정론과 이 세상은 하나의 실체이자 하나의 원리라는 일원론(Monism)을 지지했다. 모든 것의 실체이자 원리인 자존력(自存力)인 코나투스(Conatus)는 그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며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힘이자 원리다.
코나투스는 노력(endeavor)이라는 라틴어 conor에서 유래했으며 충동, 의지, 경향, 실체, 욕망, 욕구, 속성 등 여러 의미를 가지는데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다른 의미로 썼다. 코나투스는 생물이 가진 생존의지(Will to live)와 유사하며 무생물의 존재원리 나아가 신의 의지라는 뜻도 있다. 데카르트는 관성(inertia)이라는 의미로 썼고 홉스는 생존의지라는 뜻으로 썼는데 이것을 스피노자가 모든 존재의 원리라는 의미로 확장했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그 자체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고 [윤리학] 3장 6항에서 말하면서 그 보존의 노력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핵심이자 원리이고 또 실체라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긍정적이면서 창조적인 코나투스의 창조적 전개과정이고 개별 개체들의 본성/본질이다. 따라서 개별 개체의 본성/본질은 전체인 자연/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여러 다른 개체와의 관계와 질서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코나투스를 이해하는 것이 곧 신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다. 이런 관점은 인과적 결정론으로 보이지만 스피노자는 자연/신의 원리 안에서 의지의 자유가 발현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무엇에 대한 감정이거나 무엇의 영향을 받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본질/본성이 발현되는 코나투스와 능동과 수동의 정서인 아펙투스(Affectus)의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 역시 이 코나투스와 아펙투스가 발휘되어 욕구, 기쁨, 슬픔의 정서 또는 정념(情念)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려는 욕망과 욕구가 충족되면 기뻐하고 저지당하면 슬퍼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념은 이해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본능이자 속성인 감정에 충실하면서 정념의 법칙성을 이해한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 끝 - (충북대교수 김승환)
인문천문 목요학습 K-273 Thursday Study 星期四学习 2013년 6월 13일(목)
*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참고문헌 Benedict de Spinoza, The Ethics(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trans., R. H. M. Elwes, http://www.gutenberg.org/files/3800/3800-h/3800-h.htm.
*참조 <기관 없는 신체>, <내재의 평면>, <리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브라만>, <수냐타 공>, <아트만>, <운명론>, <욕망기계>, <탈영토>, <탈주의 비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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