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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수행성 Gender performativity 性别操演-김승환교수의 목요학습

2창수맨 2014. 4. 6. 10:54

 

젠더수행성 Gender performativity 性别操演

 

 

김승환교수의 목요학습

어느 날 주디 버틀러는 늙고 꾀 많은 헤겔을 향해서 ‘여성은 없다’고 말했다. 헤겔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는 사이에 버틀러는 다시 ‘동성애는 없다’라고 선언했다. 버틀러가 ‘이 세상에 여성도 없고 동성애도 없다’고 선언한 근거가 헤겔이었지만 헤겔은 이 선언을 긍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헤겔은 자신의 [정신현상학]이 그렇게 읽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헤겔철학은 보편의 역사, 절대정신, 변증적 역사철학, 자유시민을 전제로 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강화한 존재론이자 인식론이다. 그런데 주디 버틀러는 그런 고정된 정신이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단일 정체성인 본질주의(essentialism)를 거부한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이론에 근거한 주디 버틀러는 [젠더트러블(Gender Trouble)](1990)에서 인간의 고정된 주체와 정체성을 부정하는 한편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생물적 본질주의와 남녀 이분법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고 이성애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한 결과다. 또한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성애를 강화했다고 말하는 한편 라캉의 거울단계가 주체형성의 과정을 고정화시켰다고 보았다. 이런 젠더의 계보학에서 보면 성정체성 형성은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이라고 하는 지배담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버틀러는 성(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는 모두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젠더로 보았다. 버틀러는 이렇게 형성된 젠더정체성(gender identity)을 저항과 해체의 출발지점으로 삼고 있다.

 

한 인간의 젠더정체성과 연관된 젠더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이란 첫째, 이성애이데올로기,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와 같은 제도담론을 인정하는 젠더행위(gender performance)이고 둘째,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주어진 젠더의 역할을 언어, 행동, 사유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젠더를 수행하면서 동성을 사랑하지 않는 관습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동성을 사랑할 수 없는 우울증을 간직한 채 사회가 지시하고 제도가 억압하는 고정된 젠더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젠더수행을 거쳐서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다, 나는 이성애자 여성이다’와 같은 젠더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러면서 원래 인간은 그런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오인하게 된다.

 

주디 버틀러에 의하면 인간을 남성, 여성, 이성애자, 동성애자와 같은 단일정체성에 고정시킬 수 없다. 그러면서 버틀러는 그런 폭력적 제도담론을 전복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본질주의와 보편성을 해체하고 상대주의와 구성주의에 입각한 존재론이다. 또한 버틀러에 따르면 이성과 합리주의가 설계한 이항대립의 이분법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 담론이다. 이런 억압을 통하여 지배계급과 남성중심의 계략이 성공하는데, 문제는 여성, 동성애자들, 성소수자들도 이에 따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페미니즘이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고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제도담론의 책략에 빠진 것이다. 더 이상 ‘여성’과 같은 주체는 없으므로 여성해방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성애, 중성애, 무성애, 양성애와 같은 성소수자들 또한 폭력적으로 구성된 그런 담론에 포획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성소수자들은 ‘그래 나는 퀴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것을 버틀러는 ‘젠더에 앞서는 어떤 존재(there is the one who is prior to the gender)’*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주디 버틀러는 인간 존재를 끊임없이 형성되는 주체라고 가정하고 주체의 유연성과 복잡성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에게 행위주체성(agency) 즉, 능동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잘못된 정체성에서 필연성과 고정성을 걷어내면 변화가능성이 생기고 진정한 자유의 눈으로 자기를 응시할 수 있다. 거기 복잡한 복수의 자기 존재가 나타나고 변화와 재의미화가 가능하다. 가령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예에서 보듯이 젠더는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단 하나의 정체성만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고 또 살고 있다. 인간 존재를 새롭게 해석한 주디 버틀러의 젠더수행성은 퀴어이론,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욕망에 따라서 존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문제가 있는 공허한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인문천문 목요학습 315 Thursday Study 星期四学习 2014년 4월 3일(목)

*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참고문헌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New and London: Routledge, 1990).

Judith Butler, "Critically Queer". GLQ: A Journal of Lesbian and Gay Studies 1, 1993. p.21.

*참조 <거울단계/상징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항대립>, <퀴어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