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문화에 대해
친일 경찰 신상묵
Artist 2창수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을 좋아했다.
근대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하게 일본을 통해 배우고 동화되기 위해 힘썼다. 그러다 기득권에 대한 도덕적 문제가 생겨나면, 친일 민족 반역자들로 인해 생겨난 것이므로 친일에 대한 인사를 발본색출을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기득권에 대한 친일 해결에 대한 방법은 여러 번 시도 되었는데 2004년에는 ‘친일반민족진상규명법’을 추진하기위해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인 신기남의원이 공표를 하였다. 신기남의원의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를 몸소 보여주고 있을때 동네 강아지 마냥 따라다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시게미쓰 구니로(重光國雄) - 한국이름은 신상묵(강원도, 제주도 경찰 국장)이라 한다, 나라 바로 세우시는 분 아버지... ... 시게미쓰 구니로는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의 군조(중사) 이라는 직책에 있었으며 다양한 여러 일을 했겠지만 독립 운동가 고문이 주된 기록이다. 그 외의 것은 1941년 삼천리 제 13권에 기고된 그의 지원병일기를 보면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의레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렇게 당연한 것을 칭찬한다든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내가 지원병이 늦게 된 것을 꾸지람하는 이가 없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합니다.~나의 이감격을 한가지로 난호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로 마무리를 짓는 일본을 향한 호국의 마음이 깃들어있는 일기이다. 잡지를 통해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이로 인해 또 다른 불끈한 애국(일본을 사랑하는)의 마음으로 많은 황국신민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게미쓰 구니로의 일본 사랑 마음은 자신의 위치와 직책에 충실하였고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여 장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제대로된 조사가 쉽지 않았지만 분명 죽음으로 내 몰린 다른 애국 열사들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 일본에 충성했다고 연좌제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익이 분명 있었다면 그 이익을 이용하여 또 다시 특권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런 일을 보듯이 아직 한국에는 친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 한국의 정통성을 위해 국민의 대표가 되어서 친일 조력자 재산 환수등과 관련된 법을 만들며 또 다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의무 복무를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라 걱정을 한다고 NLL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도 있지만 친일 매국노가 독립투사로 변하고 있는 상황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병영 리얼 체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호주 출신 외국인 ‘샘 해밍턴’보다 군 경험도 안한 NLL수호 국회의원 3인방(3명의 병역 기록(1루 제대, 독자 6개월, 의병제대8개월)을 더해야 일반 방위병 수준도 안 된다.)을 보면서 보는 내가 왜 더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멍청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곧 주위 친일권력자들은 어느덧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을 어떻게 해서든 계획에 의해 바꾸어 왔다. 그렇게 바꾸어진 상황을 대중은 미개하게 인정하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NLL 3총사의 병역 기록
음악
여기저기 흥얼흥얼 국민 노래처럼 들리는 일명 ‘뽕짝’이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나 시장을 간다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음악. 이러한 음악에도 일본이 있었다. 이러한 일본문화를 모르고 무심코 할아버지 시대의 노래처럼 들리게 되는 것은 일본 문화에 이미 잠식이 된 것이다.
대중에 깊숙히 잠식한 Trot라는 음악은 일제 강점기 한국대중가요인데 일본 엔카가 한국에 정착하여 변형된 형태로 보면 된다. 트로트의 유래는 1910년대에 유행했던 구미 춤곡인 fox trot에서 유래되었다. 그러한 유래와 관련 없이 일본에서 변형된 엔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현재에 온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세박자와 두박자를 기본으로 특유의 꺽기 창법과 귀에 쏙들어오는 가사의 수준으로 이제는 국민가요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가 일본에서 왔다고 배척하는 것은 바르지는 않으나 이러한 문화의 저변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문화적 식민 지배가 청산이 되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1910년 중반 일본의 노래는 엔카의 형식보다는 서양의 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종의 번역된 노래를 불렀거나, 일본 민속음악인 부시(節) 방법의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발전하여 1920년대에 와서 트로트의 근본을 이루었는데 한국과 일본에는 1920~30년대 한국인 가수를 이용한 음반이 나오게 되었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 암로(暗路)의 김연실 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이들은 일본 음반 회사를 통해 등장 했으며 이것은 1920년대 일본총독부의 문화통치의 방향과도 같았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자본가들이 한국에 대규모의 공장을 짓고 한국인 자본가들도 회사 설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맞닿은 문화는, 대중을 기만하고 선동을 위해 음악을 사용하였고 일본에 맞는 대중가수를 양성하여 일본 문화에 동경하는 대중을 만들고자 조선인 출신 성공한 음악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trot를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대중을 기만하고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을 통해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남긴 것일까? 란 의심은 하면서 듣기를 바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노래가 있다. 한참 지난 1972년에 조용필가수가 발표한 음악이다. 이것을 일본사람은 다시 한국으로 일본이 와주세요 라는 해석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일본인들에게 무엇이 같고 다른지 주장 가능했으면 좋겠다. 다시 일본보고 신탁해 달라는 것이 아닌 이유를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1950년대 포스터
정치
한상범동국대 명예교수의 한국정치 우익 이야기 ‘우리나라 우익은 민족주의가 없다. 왜냐하면 일제시대 친일로 투항했던 매국노들이니까 이 사람들의 유일한 논리는 반공뿐이다. 반공이 없으면 용공분자를 만들어 내는것 이것이 유일한 우익의 생명선.....’ 나는 이이야기를 듣고 그간 신문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사설의 기본 방향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떠한 사건을 적절한 순간 어느 강도로 사건을 언론에 노출 시키는 지도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계획적인 접근으로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고, 언론 방향을 조정하고 또 대중 움직임을 염두에 두면서 발표를 한다. 이러한 발표를 하기위해 먼저 사설이라는 개인적 의견을 이용을 한다. 결국 대중은 그 치밀한 기본 논리를 모르는 체 순수하게 이해를 강요당하며 산다.
출처 : 일베싸이트
최근 급속도로 발달한 정보 통신에는 개인 방송, 블로그 등 개인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덜 정화된 논리들이 사실로 위장되어서 퍼져 나간다. 정치는 이러한 것을 어떻게 통제를 할 것인가가 현재 우익의 최대 관심사가 될 것이다. 미국처럼 개별 언론을 키우고 더 큰 언론이 이것을 합병해서 폐기시키는 일이 앞으로 생길 것이다. 그 논리에 반공이 더욱 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양분시키는 것이 더 큰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와 있는 것에는 그만큼 더 깊은 내막이 있다.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먹혀드는 것에는 무지한 대중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없는 우익이 우리의 우익처럼 미국과 일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이상한 우익의 논리, 아직도 대중은 세계가 냉전시대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술
다양한 논리와 개성을 중요시하는 장르이다 보니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미래적이라 볼 수 있고 친일이나 편양된 이념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술자체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대중의 관심 밖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로 왔다. 그래도 김경승(金景承,1915-1992)을 거론 안 할 수 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지주로 살았던 아버지를 두었다고 친일이라 하기는 어렵다.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갔다고 해서 친일이라 하기도 어렵다. 조선 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선전에서 상을 받고 초대작가가 되었다고 친일 작가라 하기는 어렵다. 비록 일본의 문화 통치기간 일본의 색에 맞는 미술을 장려하고 그러한 미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친일 미술가로 하기엔 좀 그렇다. 그만큼 미술에서 친일에는 관대했다. 대표적 친일 미술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로 활동한 것은 자발이었다고 보기에 친일로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가 회장으로 있던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단체였다. 김경승은 조각부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형 김인승도 서양화부 평의원이었는데 1943년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었고 1943년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을 하며 1백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문제라도 김인승은 해방 후 19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에 부임하였고 대표적인 미술단체인 <목우회> 창립을 주도 하였으며 미협 이사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 원로로 활동 하였다. 그의 동생 김경승은 이화여대 교수, 국전 심사의원, 예술원 회원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기념 조각사업을 하였다. 국회 중앙계단의 이순신 장군상, 안중근의사, 안창호 선생, 김구선생 등 친일과는 거리가 먼 애국지사들의 동상을 제작하게 된다. 이들은 갖은 기득권으로 문화훈장, 3.1문화상까지 받는 기염을 토한다.
친일조각가 김경승작 김구
예술은 시대정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들이 잘 만들어 놓은 조각품을 우리는 예술로 보아야 하는가? 대중은 무지하다 하지만 영특한 지도층에서 무지한 대중을 이끌어도 좀처럼 이끌리지 않는 저항의 근본은 이러한 친일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내재되어 있어서 이다. 국론 분열하지 말고 그냥 덮고 가자는 기득권의 논리는 수많은 시간 해결되지 못한 앙금을 끝가지 지고 가게 될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친일행적, 일본식 통치 학교를 나오고 일본어를 잘하고 또 엔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한국을 일본이 왜 대화상대로 낮추고 있는지는 국민만 모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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