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가 새로운 미술 세상에 대한
가능한 대안인가?
Artist 2창수
중앙에 의존한 신문물의 목마름은 씹다 뱉어낸 부산물과 같은 느낌이다. 운이 좋아 아직 단기가 덜 빠진 달달한 문물을 쉽게 받아 응용가능하기도 하지만 결국 뿌리 없는 사용은 중앙 의존도만 더욱 강화 시킬 뿐이다. 과거 새로운, 신문물에 대한 목마름은 정보, 정치와 경제 등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을 통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통신의 발달은 중앙 집중화된 모든 권력 분산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서울)을 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새로운 가능성 시대가 이미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역 한계는 경제, 정치, 인력처럼 적은 규모로 인한 만만치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뛰어난 인력과 자본 등은 더 가능성이 많은 중앙으로 유출되고, 남아있는 지역 상황은 약간의 직업과 연결된 애매한 상황, 퇴직 후 귀향, 중앙 진출 교두보와 같은 마치 힘 빠진 퇴역 군인과 같은 모양이다. 퇴역 군인의 맹활약으로 동내 깡패들을 때려잡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정규군 같지 않은 뭔가의 어설픔이 있다.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될 아서 댄토(Arthur Danto)의 ‘예술의 종말’을 가져다 붙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예술로 변화되는 다원주의적 시대로 요즘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중앙에서 하는 미술운동만이 오늘날 미술 행위 답이 아니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지역에서 각기 파생되는 후진 미술 운동에도 나름 규칙과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기본적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지역의 다원주의는 이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넘어서는 어떤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미 중앙과 다르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며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필요하다. 지역이라 좀 못나고 후져도 된다는 어설픈 접근은 안 된다. 다원주의 예술 접근은 중앙과 지역이 동등한,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몇몇 예술인들은 당연히 중앙과의 경쟁이 불가능 할 것이라고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고 시작하는데 그럴게 할 거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지역의 장점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 중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는 것이 좀 더 현명한 것이다.
미술은 그동안 작가 개인의 관점을 중요시 생각지 않았다. 과거 미술을 개인 전유물로 사용하는 소수 귀족 계층이 거의 모든 예술을 소비했고 특권자들의 제안을 통해 미술의 방향도 조정되었다. 그 당시 화가들도 큰 불만이 없었는지 시키는 행동을 잘 했거나 아님 비싼 물감 값에 순순히 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고만 고만하게 잘 지냈던 것 같다. 1839년 정식으로 사진이 발명품으로 등록이 되고 좀 더 과학의 발전으로 1800년도 후기부터는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미술가들은 주요 수입원인 초상 제작에 엄청난 경쟁자가 생긴 것이다. 그래도 산업의 혁명으로 부가 늘어나서 고객의 수가 늘어나는 호황도 있었기에 그런대로 살만했을 것이다. 소비층이 변했다는 것은 또 다른 고객의 기호를 예술가들이 맞추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운동의 대표적 경향은 1960년 미니멀아트로 혹은 cool art로도 불리던 이 미술운동으로 절정을 맞는다. 고객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작가는 극도로 작가의 주관을 철저히 개입을 시키지 않으려는 시도를 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인 미국으로 엄청난 자금이 몰려 왔으며 그 몰려온 자본이 수많은 소비자들을 양상 했으며 다시 미술시장의 구매력이 되었다. 이 구매력을 맞추어 주기위해 수많은 시각적 관점을 수용한 미니멀 아트가 나왔으며 그 행위를 통해 예술가는 새로운 관점의 중심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든 구매자의 관점을 수용하는 절제된 미감 그것으로 세련된 색종이형태의 미술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미술은 작품의 분석에 앞서 시대적 특수성을 지역 특수성과 연결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 이러한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을 아직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뉴욕에 가면 컨트리송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 할지 모른다.
이제 지역은 모든 것을 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제의 시각, 시점은 구매자가 아닌 작가 개인에 의해 결정된다. 시각적 실험도 중요 하지만 그것을 벗어 날 수 있는 실험, 그것은 지역의 속성을 담는 예술적 실험이 될 것이다.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시점을 혹은 감성을 표현한 것이라 말하는 화가들도 있지만 그런 1차원적 예술 접근 방식은 아마추어적 예술가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화가의 접근이다. 그러나 오늘날 나의 그림이 왜 중요 할 수 있을지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그 중요하게 증명해야 하는 작가론은 나의 행복이나 관람객의 유흥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 꼭 필요한 미술 주장이 수반 되어야 한다. 난 그런 미술운동의 주장에 지역적 속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에는 미술 시장 형성이 거의 불가능 한 것 같다. 전시를 할 때면 아는 사람들 초대하여 작가들이나 지인들의 상황만 더 난처하게 만드는 전시는 안해야 할 것이다. 그림 값이 비싸야 탈세 목적으로 자식에게 양도해주고 갤러리를 통해 뒷거래에 이용되는 작가가 되어서 성공해봐야 예술가적 어떤 철학을 기대하나? 그래도 시장에서는 이런 작가로 미술 시장이 유지 된다고 하는데 하층 작가들은 떨어진 부스러기나 구걸하며 살기에도 벅차다. 하다못해 뒷거래 전문 작가들을 보면서 자기도 그 작가처럼 미래 신데렐라가 되려는 꿈을 꾸는 자도 있으니 투명한 미술품 양도세에 대해 정리를 하길 바란다. 더 나은 미술을 꿈꾼다면 자본 독립이 가능한 미술 운동에 대해 지역 예술계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 합리적 해결이 빨리될수록 지역 예술계는 더 건강해 질것이다.
이미 한국 경제는 새로운 일자리가 쉽지 않다. 과거 구로공단 공순이들의 재봉틀로 나라 경제를 살린다는 그런 방식의 경제화는 어렵다. 자동차, 철강, 섬유 공장 등에서 노동력을 동원하는 시대는 지났다. 일도 하지 않으려 하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면 알아서 한다는 기계화와 더 나은 조건의 2~30년 전의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데 이익에 목숨을 거는 기업이 국민 기대에 부흥할일은 없다. 유럽의 정체 화된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처럼 식민지를 만들어 고혈을 빨 힘도 없는 한국은 대기업 키워 못사는 나라를 경제로 고혈 빠는 수밖에 없고 정부는 세금 많이 걷어서 공무원 수 늘리는 것 말고는 딱히 대책도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미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없다는 것에 있다. 중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 지역 미술운동이 되기 전 작가 개인 생존을 위해 잡역을 가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성을 수반한 예술운동이나 구매자의 관계설정 같은 생각을 하며 작가는 옹벽에 페인트칠한다. 별다른 고민없이 영국 작가들도 흉내 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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